다른 나라에서
- 타이틀 : 다른 나라에서
- 감독 : 홍상수
- 개봉 : 2012년 5월 31일
- 주연 : 이자벨 위페르
- 조연 : 정유미, 윤여정, 유준상, 권해효, 문소리, 문성근
- 까메오 : 김용옥
- 러닝타임 : 89분

- 기대도 : 6
- 만족도 : 8
- 서울극장

- 사실 난 홍상수 영화에 여지껏 별로 좋았던 기억이 없고, 이자벨 위페르가 출연하지 않았다면 이 '다른 나라에서'도 아마 볼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결과적으로 감상 후의 느낌은 안 봤으면 많이 많이 아쉬웠겠다 싶은 기분.
- 이자벨 위페르는 여지껏 한국영화에 캐스팅된 외국 배우들 중엔 단연 중량급이라 할 수 있겠는데,(클레멘타인의 스티븐 시걸이나 라스트 갓파더의 하비 케이틀은 그냥 없던 셈 치자) 뭔가 줄창 작가주의 영화만 꾸준하게 찍어 온 홍상수 작품에 출연한다니 일견 어울리는 듯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원체 대형 배우인지라 과연 일상 긁어대기로 일관하는 홍상수표 각본에 어떻게 녹아들런지 궁금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홍상수 영화를 보러 갔다기 보다는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이자벨 위페르를 보러 간 것.
- 액자식 구성이나, 옴니버스식 구성은 홍상수 연출작에서는 그리 특출날 것도 없는 수법인데 다른 나라에서 역시 도입부에서 액자식 스토리텔링임을 당당히 선언하고 영화 속 영화 세 꼭지를 옴니버스식으로 늘어놓고 있다. 그런데 이 옴니버스식 구성이 개인적으로는 아주 맘에 들었다. 밤과 낮 이후 홍상수 영화들은 아마 빠진 거 없이 다 봤던 걸로 기억하는데, 개중 다른 나라에서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 이 3부작 옴니버스 구성에 있어 가장 특이한 부분은 각각의 챕터가 유기적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결코 개연성은 부여하고 있지 않다는 점. 유기적이면 그게 개연성 있는 게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쫌 그렇지가 않다. 필력이 부족해서 칼같이 설명하긴 좀 힘든데 3개의 챕터가 배우, 캐릭터, 셋트, 동선, 대사를 공유 혹은 변주하고 있지만 이 요소들이 어디까지 일차적으로 독립되어 작용할 뿐 다른 챕터에 연결고리로 작용하지는 않는다는 얘기. 사실 아주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컷이 라스트씬에 등장하기는 하는데 이건 밑에 따로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 요즘은 거의 플레이한 물건이 없지만 예전엔 텍스트 분기로 스토리텔링이 진행되는 비주얼 노벨류의 게임을 참 징하게 플레이했었는데, 요즘도 술빨면서 가끔 하는 얘기지만 군입대 직전엔 동시에 10개 이상의 노벨을 플레이하면서 대충 50여명은 족히 될 캐릭터들을 공략하다 보니 스토리, 설정, 에피소드가 막 뇌내에서 마구 혼합되어 유사 착란 상태에도 이르고 막 그러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썰 풀다가 갑자기 왠 덕후 시절 무용담이냐 하면,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법이 오소독스한 텍스트노벨류의 그것과 여러모로 매우 유사하기 때분에 꺼내본 것.
- 특히 (지금은 멸망한지 오래인) 키드사의 오리지널 작품들을 플레이하다 보면 캐릭터별로 각각의 가지치는 시나리오가 존재하고 이 시나리오들을 모두 제대로 클리어하고 나면 히든 플래그가 전면개방되면서 그랜드피날레 시나리오로 귀결되곤 하는데, 이 다른 나라에서의 스토리텔링은 딱 그랜드피날레 시나리오 열리기 전에 개별 시나리오에서 떡밥을 던지는 그 단계를 묘사하고 있다. 쉽게 말해 진엔딩 보겠다고 열심히 플래그 회수하는 단계랄까.
- 하지만 게임과 다른 점이라면, 플래그를 회수하려 해도 딱히 회수할 플래그가 없다는 건데 유기적이기는 하되 개연성은 없다는 게 바로 이 얘기다. 다만 이자벨 위페르가 챕터 2에서 우산을 숨기고, 챕터 3 라스트컷에서 숨긴 우산을 습득하는 시퀀스는 영화 내에서 유일하게 대놓고 플래그를 쎄우는 장면인데 사실 굳이 이런 장치를 삽입한 홍상수의 의도는 잘 모르겠다. 라스트컷 롱테이크씬이 미학적으론 훌륭했지만, 별안간 독립성이 와해되고 기존 챕터에서 인과관계를 끌어온 탓에 통일성 면에선 약간 붕 뜬 기분.
- 아무래도 주연 배우가 외국인이다 보니, 많은 대사가 외국어(영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충 한 50% 이상은 족히 되는 느낌. 홍상수 영화의 대사들은 좋게 말하면 가식이 없는 거지만, 까놓고 말하면 찌질함의 결정체들이라 과연 이 찌질함이 영어 대사로는 어떻게 표현될까도 참 궁금했는데, 결과는 대박이었다. 권해효, 유준상, 문성근이 내뱉는 영어 대사들은 뭔가 그릇만 한국어->영어로 바뀌었을 뿐 홍상수 기존작들에서 느껴지던 찌질함이 그대로 담겨 있어서 참 기가 막힐 지경.
- 이사벨 위페르는 소주, 등대, 모항, 쎄울(...) 등 극히 제한된 몇몇 어휘를 제외하고는 모든 대사를 영어로 소화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챕터 3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불어 대사 한 꼭지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매우 유창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역시 네이티브 스피커.
- 각각의 챕터에서 이사벨 위페르의 헤어스타일, 복장, 걸음걸이 등은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데 특히 환갑을 바라보는(넘었나? 암튼) 나이에 소녀처럼 종종대면서 걷는 위페르의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 밖에 동일한 셋트/로케지에서 알게 모르게 챕터마다 달라지는 그녀의 동선을 쫓아가면서 감상해 보는 것도 매우 재미났다.
- 이러한 동선을 쫓는 과정에서 좀 당황스러웠던 건 중간중간 (아마도 의도적으로) 연결컷들이 소거되어 있음이었는데 특히 세 챕터에서 공히 에피소드의 발원 역할을 수행하는 정유미가 장보러 가면서 이사벨 위페르를 리드하는 씬에서 정유미는 모두 유령처럼 사라져 버린다. 챕터 1에서는 특히나 부자연스럽게 사라져서 이게 뭔가 좀 어안이벙벙했는데 다 보고 나니 연출의도가 대충 짐작은 갔다. 챕터 2에서도 사라지긴 마찬가지지만 1부에 비해서는 좀 스무스해졌고, 뭣보다 우산을 동시에 펼쳐드는 씬은 개인적으로 영화 내에서 가장 맘에 들고 예쁜 장면이었다.
- 기본적으로 홍상수는 롱샷을 거의 찍지 않는 감독인데, 이 영화에서도 대부분의 씬은 미디움샷과 클로즈샷의 혼용으로 이뤄져 있다. 또한 클로즈샷 상태에서의 줌인 줌아웃이 몇 차례에 걸쳐 등장하는데 헨드헬드 느낌을 살리려고 의도적으로 거칠게 찍은 건지는 몰라도 좀 심하게 흔들리는 느낌의 씬들도 있었다. 어쩌면 그냥 저예산 영화라서 그런 건데 괜히 의미 부여를 하려는 걸지도.
- 정유미는 이 옴니버스 3부작의 화자격인 캐릭터인데, 영화 속 영화에서도 길잡이 역할의 키퍼슨으로 출연한다. 근데 짤막짤막하게만 등장해서 비중은 그리 많지 않은 편. 요즘은 다른 정유미도 꽤나 인기라서 헷갈려 하는 사람도 좀 있을 텐데, 난 역시 이 정유미 쪽이 좀 더 좋다. 예전에 모처에서 연수받을 때 중간에 영화를 두 번 틀어줘서 봤던 게 홀리데이랑 가족의 탄생이었고 홀리데이는 정말 최악이었는데 가족의 탄생은 꽤 괜찮았더랬다. 그 때 가족의 탄생에서 봤던 귀여운 정유미 이미지가 간만에 돌아온 느낌. 좀 부담스러울 정도로 살갑고 친절한 것도 그렇고. 암튼 대충 6,7년은 지난 건데 얼굴은 어찌 그대로인 건지 이제 동안종결자는 임수정보다는 정유미 쪽으로 바톤을 넘겨야 할 것 같다. 수정는 언니 요번에 내 아내의 모든 것 보니까 이쁘긴 이뻐도 이제 나잇살 좀 보이시더만요.
- 그 밖에 윤여정, 문소리, 권해효, 문성근의 찌질한 일상 연기도 역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윤여정은 개인적으로 스크린에서 제일 맛깔나게 담배를 빨아 대는 여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에선 이자벨 위페르도 흡연씬이 좀 나오다 보니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없지 않기는 했다. 위페르는 담배도 어쩜 그리 우아하게 빨아들이는 건지 원.
- 조연들 중에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으리라 여겨지는 건 단연 유준상인데, 챕터마다 등장씬이 호쾌하게 헤엄치는 씬이라 아마 칼로리 소모가 엄청났을 듯. 뭐 포스터에도 이자벨 위페르랑 유준상을 세워놓은 걸 보면 사실 거의 주연급인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유준상 몸이 저렇게 좋은 줄은 미처 몰랐는데 챕터 1 처음 나올 땐 순간 유준상인 것도 몰랐을 정도.
- 챕터 3에서 깨알같이 도올이 등장하는데, 영화 시작할 때 출연배우들이 텍스트로 흘러갔고 여기에 김용옥도 있었건만 순간 잊고 있다가 갑자기 딱 나타나는 순간 되게 웃겼다. 상영관에 5명 정도 있었는데 김용옥 딱 나오니 2.1채널 쯤으로 웃음보 터짐. 이자벨 위페르랑 김용옥이 영어로 선문답을 주고 받는 장면을 극장에서 본다는 건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인데, 이 씬만으로도 티켓값은 갈음하고 남음이 있을 듯.
- 홍상수 영화들이 워낙 일상 묘사가 많은지라 본의 아니게 소품 타이업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도 참이슬, (하이트) 맥스, 신라면, 코베아 등이 줄기차게 등장한다. 안그래도 많이 나오는데 3부작 옴니버스 동어반복 스토리텔링이니 좀 많이 나오겠나. 속으로 야 이 정도로 나오면 뭔가 제작지원이라도 좀 받아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과연 스탭롤 올라갈 때 보니 협력업체에 농심, 하이트 등이 눈에 띄었다.
- 여기부터는 영화랑은 크게 상관없는 얘기일 수도 있겠는데, 사실 영화 보면서 내내 인피니티 시리즈 1탄이었던 네버세븐이 떠올랐다. 무인도는 아니지만 뭔가 격오지 느낌이 물쓴 풍기는 해변, 복층 구조의 아담한 펜션, 챕터마다 동어반복을 구사하지만 병렬적으로 행각이 분기를 타는 여주인공 등등. 물론 홍상수가 인피니티를 플레이해봤을 확률은 제로에 수렴한다고 보지만 그냥 그렇다는 얘기.
- 네버세븐은 사실 20세기에 그냥 인피니티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었다가 이게 인기 좀 끌고 하니 차세대 기종(당시 DC, PS2)으로 살 좀 붙여서 이식되면서 네버세븐 디 엔드 오브 인피니티로 재발매된 물건인데 난 나름 이 시리즈의 광팬이라서 방에는 아직도 저렇게 포스터가 붙어있을 정도. 물론 딱히 팬이라서 아직까지 붙어있다기보다는 그냥 옛날에 붙여놓은 게 아직 안 떨어지고 그냥 있는 거긴 하다.
- 다른 나라에서 포스터에서 이자벨 위페르가 입고 있는 저 빨간색 원피스는 챕터 2에 등장하는 복장인데, 이게 또 인피니티의 여주였던 카와시마 유카가 평상복으로 입고 댕기는 원피스랑 묘하게 흡사하다. 네버세븐 포스터엔 뭔가 하루카가 메인 여주인 마냥 중앙에 포지셔닝해 있고 유카는 좌측으로 밀려나 있는데, 암튼 챕터2 이자벨 위페르 딱 보는 순간 유카가 바로 떠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사고축이 유카 CV 맡았었던 카와카미 토모코로 넘어가서 영화 보던 중에 괜시리 잠시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카와카미 토모코 사망(..뭐 고령이신 분도 아니었고 해서 타계라기는 쫌)한 게 대충 작년 이맘때쯤이었던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도 참 안타깝다.
-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다른 나라에서 보다가 사유 루틴이 인피니티->카와시마 유카->카와카미 토모코 로 이어지면서 꿀꿀해지는 건 아마 지구상에 나 하나 정도이려나. 혹시라도 나 말고 그런 사람 있으면 술이라도 함 같이 빨고 싶은 심정.
- 영화는 기대했던 이상으로 매우 만족스러웠음에도, 짜증났던 점 한 가지는 뒷줄에 앉은 나이 드신 남성 분 한 분이 대충 러닝타임 한 시간 넘어가면서부터쯤 미친 듯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는 건데, 챕터 3에서 유준상이 코골던 것보다 더 크게 울림이 느껴지는 문자 그대로의 굉음이었다. 상영관에 나 말고 남자둘, 여자둘 더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성 두 분은 코고는 소리에 계속 깔깔거리면서 즐거워하시던데 난 뭐 같이 즐거워할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짜증만 엄청스레 났다. 옆이거나 앞줄 쯤이었으면 물리적으로 제재라도 가했을 텐데 뒷쪽에서 들려오니 손쓰기도 그렇고 참. 나가면서 보니깐 참 멀쩡하게 생긴 분인데 왜 숙면을 극장 와서 취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
- 딱히 홍상수를 빤다거나 임상수를 깔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하필 이번 칸 경쟁부문에 양(兩)상수 영화가 같이 출품됐다니 다른 나라에서 생각하면 뭔가 뿌듯한데 돈의 맛은 괜히 내가 막 부끄러워진다. 뭐 기립박수 기사 나오고 그러던데 원래 칸은 영화 끝나면 기립박수야 그냥 다 치는 거고 관객들이 박수치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그러고 보니 윤여정은 다른 나라에서, 돈의 맛 양쪽에 다 나왔구나. 이자벨 위페르도 아무르에 나왔던데 칸도 가만히 보면 요새는 맨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것 같기도. 테렌스 멜릭 신작이 걸렸으면 꽤 흥미로웠을텐데.
- 홍상수 영화는 사실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길게 늘어놓을 꺼리가 거의 없는데 이번엔 이자벨 위페르나 인피니티 탓인지 쓰다 보니 엄청 두서없고 맥락 상실한 장광설이 되어 버렸다. 막 남들에게 권하기는 좀 뭐한 영화지만 네버세븐 재미나게 플레이했던 분이라면 한 번 꼭 보러 가시길. 결론이 뭐가 이 따위냐.
by Lucier | 2012/06/06 13:08 | Movie | 트랙백(1)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Lucier.egloos.com/tb/384813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BLOG at 2012/06/10 15:13

제목 : 다른나라에서
칸 현지의 미적지근한 반응과 중하위권에 해당한다는 '평점'을 시시각각 전해오던 한국 언론들의 호들갑과는 무관하게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았다는 홍상수 감독의 이 신작에 대한 기대감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제목이 암시하듯 '타국 땅에서' 의사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외국인의 모습을 홍 감독이 과연 어떻게 풀어냈을까 하는 의문은 아무래도 직간접적인 관련 경험들이 많은 나로서는 더더욱 와닿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이동진 기자가 그의 리뷰에서 ......more

:         :

:

비공개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