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이지호스
- 타이틀 : 크레이지호스(Crazy Horse)
- 감독 : 프레드릭 와이즈먼
- 개봉 : 2012년 4월 19일
- 주연 : 필립 카트린느, 데이지 블루, 필립 드쿠프레, 크레이지 걸스
- 러닝타임 : 111분

- 기대도 : 6
- 만족도 : 8
- 스폰지하우스 광화문

- 예매를 해 뒀는데 막상 보러 나가려니 전날 술빨았던 게 적당히 어질어질해고 속은 완전 안 좋아서 어쩔까 그냥 쨀까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지금 안 보면 순식간에 내려갈 것 같아서 툴툴대며 기어나가는데 막 돌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서 아놔 내가 영화 하나 보러 주말 아침부터 이렇게 비맞고 나가야 되나 심히 의문스럽던 차에, 다행히도 영화가 충분히 만족스러워서 보고 나오면서는 기분이 많이 풀렸다. 바짓단은 쫄랑 다 젖었지만.
- 상영관이 서울에 꼴랑 하나인 데다 하루에 한 번 트는데 그게 10시 20분이라서 그냥 선택의 여지가 없이 조조로 봐야 된다. 뭐 단돈 5,000원에 크레이지호스 살롱의 그 유명한 쇼를 (맛배기나마) 접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하면 확실히 나쁘진 않다.
- 전단에는 오감만족 아트섹슈얼쇼라고 카피가 박혀 있고, 홍보도 (거의 안 이뤄졌지만) 완전히 그런 쪽이라서 그냥 야한 영화겠거니 생각할 수 있는데, 의외로 대단히 오소독스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뭐 프레드릭 와이즈먼 연출작이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서도.
- 촬영자의 개입, 나레이션, 서술 이런 거 일절 없다. 그냥 매우 건조하게 카메라 앵글만 기가 막히게 잡으면서 공연장 주변의 날서고 긴장된 공기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고 있다.
- 오감만족이라곤 하지만 이 영화의 심미안적인 타겟은 시각적 즐거움에 한 80% 이상 치중되어 있고 나머지 대부분이 청각적인 즐거움인데, 이 시각적 즐거움이 야해서 즐겁다는 게 아니라 조명과 색조합 등 기술적으로 완벽해서 눈이 참 즐겁다. 반면에 야한 거 기대하고 온 사람이라면 아마 십중팔구는 돈이 아까울 꺼다. 진짜 러닝타임 내내 출연자들이 나체로 등장하는데도 이렇게 흥분되지 않는 영화는 첨 본 듯.
- 크레이지 호스 무대에 서는 무희들의 비주얼적인 매력은 물론 압도적이지만 이게 황홀하거나 육감적인 느낌이라기보다는 뭔가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혹자들은 화낼지도 모르겠지만 얼마전에 봤던 이소선 여사 소재로 한 영화 어머니보다도 난 이 크레이지 호스가 더 노동자 영화 냄새가 물씬 풍겼다. 어머니는 그냥 울지마 톤즈 류의 전기 영화 느낌이었고.
-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의 무희들은 Dancer나 Performer라기보다는 Worker 로 느껴진다는 거다. 비단 무희들 뿐만 아니라, 무대 연출자, 대화 중에만 등장하는 극장 주주들, 디자이너, 테이블 스탭, 나아가서는 공연장의 소품들까지 스크린을 무게감 있게 꽉 채우고 있다.
- 야한 느낌이 없다고는 했지만, 이건 혼자 봐야 하는 영화다. 가족끼리 봐도, 친구끼리 봐도, 연인끼리 봐도 매우 민망할 꺼다. 낮뜨겁고 그런 건 아닌데 어쨌든 노출이 너무 심해서 민망할 수 밖에 없다.
- 무대 연출을 둘러싼 갈등은 결국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완벽하게 조합시키려는 데서 나오는데, 하드웨어라 할 수 있는 무희들의 신체는 미학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 딱히 기승전결이랄 게 없는 영화지만, 그래도 클라이막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후반부 오디션 씬에서 '춤 솜씨나 연기력은 안 본다. 몸매랑 신체 비율을 중점적으로 본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게 이 영화와, 크레이지 호스 공연이 추구하는 미학적인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몸이 참 예쁘긴 예쁜데 성적으로 아름다기보다는 유클리드 기하학적으로 다듬어진 황금비율로 치환되는 미적 개념이랄까. 밀로의 비너스 보면 상하체가 황금비율 어쩌고 하지 않는가 딱 그런 비슷한 느낌이다.
- 물론 춤이나 연기를 안 본다고 해서 이게 형편없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일단 완벽한 하드웨어 되는 자원을 뽑아놓고 피눈물나게 트레이닝해서 맞춰가겠다는 거. 공연 준비 과정 보면 출연진이나 스탭들이나 정말 급여 많이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반면에 소프트웨어, 즉 공연 레퍼토리, 배경, 음향, 미술 파트 등을 둘러싼 첨예한 의견 충돌은 단순히 쇼를 관람하는 관객들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치열한데, 디렉터의 인터뷰 내용 중 '일본인 대상 문란쇼라는 선입견을 없애고, 여성들이 더 선호할 수 있는 고품격쇼로 만들고 싶다'는 게 참 공감이 갔다. 실제로 보면 문란할 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유라시아 정반대쪽에서 적당히 찌글거리는 스크린을 통해 본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품격있게 느껴졌다.
- 다만 좀 맘에 안 들었던 건, 영화 내적인 건 아니지만 화질이 심각하게 안 좋았다. 상영 소스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디지털이면 이렇게 지직댈 것 같진 않고 필름이 아닌가 싶다만 이게 무슨 몇십년 전 필름도 아니고 작년도 작품인데 왜 이런지 모르겠다. 화질만 좋았으면 진짜 눈호강 좀 제대로 했을 텐데 아쉬울 따름.
- 아트 디렉터로 무려 크리스찬 루부탱이 참여하고 있다. 명품 만드는 그 루부탱 아저씨 맞다. 실제로도 크레이지 호스 공연 연출에도 참여하고 했다는데 암튼 프레데릭 와이즈먼에 크리스찬 루부탱 조합이니 화면빨이 기가 막힌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 다만 난 참 만족스럽게 봤지만, 다른 사람에게 권할 만 하냐면 절대 못 권하겠는데 뭣보다 일단 전혀, 눈꼽만큼도 재미가 없다. 애시당초에 재미를 추구한 물건이 아닌 데다 이야기 얼개도 뭔 전개가 딱히 있는 게 아니라 병렬식 나열이라 실제 러닝타임에 비해 훨씬 더 지루하게 느껴지고, 뭣보다 그냥 눈요기할 요량으로 본다면 눈요기씬들이 벗긴 다 벗었는데 어지간한 예술영화보다 더 미학적이라서 그냥 나가버리고 싶어질 꺼다. 나 볼 때 나까지 네 명 있었는데 여성 관객 한 분은 실제로 반쯤 보다 나가셨다. 근데 나가려면 첨부터 나갔을 꺼 같은데 반이나 보다 나간 건 좀 의아하긴 했음. 암튼간 눈요기 내지 야한 거 기대하고 볼 사람이라면 이것보다는 차라리 상영관도 훨씬 많은 간기남 관람하는 쪽을 추천.
- 서울에 상영관이 스폰지하우스 딱 하나에다 오전에만 틀고 있어서 챙겨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겠지만 다큐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꼭 볼 만한 영화다. 더불어 미술학도나 무대 연출자들 또한 보면 뭔가 느껴지는 게 많을 듯. 요새 파라노말 액티비티 같은 것들이 대박치면서 페이크 다큐 타입의 물건들은 제법 많이 나오는데 이런 오소독스하게 건조한 다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데다 소재는 건조함과는 거리가 몇광년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크레이지 호스이니 5,000원 내고 보면 정말 공짜나 다름없긴 하다.
- 블루레이나 DVD가 나중에 나오면 꼭 구해 보고 싶은데, BD는 커녕 듭드도 국내에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고 설사 나와서 구한다 쳐도 집에서 보긴 또 많이 애매할 꺼라. 결론적으로는 숙취에 힘겨워하면서 비바람을 헤치고 보러 나갔지만 잘 보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 상영관은 스폰지하우스 하나지만, CGV 쪽에서 쇼케이스 형식으로 한 번식 틀면서 간보기하는 모양이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그 쪽을 노리는 편이 나을지도. 압구정에서 한 번 했고, 강변에서 또 하는 거 같은데 나중에 무비꼴라쥬 레이블로 소규모 재개봉할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압구정 쇼케이스로 보려고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시간대가 안 맞아서.
- 근데 원래 러닝타임이 134분이던데 국내 상영분은 20분 이상 잘려나갔다. 요 밑에 하늘이 보내준 딸과는 달리 딱히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없긴 했는데 그래도 무삭제 버전을 보고 싶었건만 대체 어떤 부분이 컷된 건지 모르겠다. 나체씬 모자이크도 없이 계속 나오던 거 보면 야해서 짤랐을 것 같진 않고, 어차피 보는 사람만 챙겨 보고 상영관도 거의 없는 이런 영화가 러닝타임 좀 더 길다 해도 아무런 상관없을 텐데.
by Lucier | 2012/04/22 21:47 | Movie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Lucier.egloos.com/tb/383248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Placebo at 2012/04/22 22:24
저는 이 영화 저와 궁합이 어느 정도 맞을 것 같습니다. 혼자 보라고 하셨지만 혼자 보기 보다는 코드 맞는 누군가와 보러 가면 어떨까 생각 해 봅니다. 노동자의 느낌이 나는 댄서들 그리고 스텝들. 괜찮을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Lucier at 2012/04/23 22:31
저는 안타깝게도 이런 코드 맞을 것 같은 지인은 없는지라. 영화 자체는 소재의 현란함과 촬영 방식의 건조함이 대조적이면서도 잘 어우러져 있어서 참 맘에 들었는데 20여분 짤린 버전인 게 참 껄쩍찌근하네요. 나중에라도 무삭제 버전이나 DVD 접할 기회가 있으면 다시 보고 싶습니다.

:         :

:

비공개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