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게임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제작한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는 어지간하면 눈길도 안 주는 편인데, 그 특유의 감동을 짜내려는 연출이 체질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셔널리즘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크리티컬인데 뭐 국가대표 같은 영화가 아주 대표적인 케이스랄까.

아무튼 그런 고로 이 퍼펙트게임도 별로 볼 생각은 없었는데, 시사회 다녀온 지인 말로 상당히 괜찮다기에 그냥 속는 셈 치고 한 번 볼까 싶어 봤더니...역시 속아 버렸다.

전에 머니볼 감상 쓸 때 아주 매니악한 MLB팬이나 아예 야구엔 관심도 없는 문외한보단 그냥 적당히 기본적인 야구 규칙 정도 알고 있는 일반적인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었는데, 일단 영화 퀄리티는 차치하고라도 퍼펙트게임도 좀 그런 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매니악한 야구팬이 머니볼을 보고선 원작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건조함과 담백함에 좀 심심한 감을 느낀다면, 이 퍼펙트게임은 지나친 픽션 삽입으로 인해 결과물이 싸구려 감동유발물로 전락해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최동원, 선동열의 15회 연장 맞대결은 사실 어지간한 연배 되는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소재고 그 자체로도 매우 드라마틱하기에 그냥 사실적으로 따라가면서 양념만 조금씩 쳤어도 충분히 괜찮은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 꺼고, 나 또한 지인이 괜찮다기에 '아 감동 짜내는 거 없이 담담하게 잘 버무렸나보다' 생각했는데 실망스럽게도 전혀 쓸데없는 억지스러운 장치들을 영화 도처에 삽입시키면서 뭐 시작되려던 감동마저 뿌리채 다 잘라버린 격.

뭣보다 이 퍼펙트게임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너무나 많은데, 뭐 스포츠 영화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윤색은 있을 수도 있다고 보지만,(사실 이 15회 연장 소재는 일말의 윤색도 필요없다는 생각이긴 함) 박만수, 강현수라는 완벽한 허구의 인물을 둘이나 주요 캐릭터로 삽입시켜 억지로 감동을 유발시킨 데다, 최정원이 분한 여기자는 대체 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붕 뜬 캐릭터인데 여성 비율이 영화 통틀어 너무 떨어져서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나리오에 전혀 녹아들지 못 해 완전 쌩뚱맞은 느낌에다 연기도 참 별로라 이 여기자 나올 때마다 손발이 마구 오그라들었다. 최정원이 그렇게 연기 아주 못하는 배우는 아닌데 이 영화에선 참 아니다.

강현수, 박만수라는 허구의 인물들이 왜 영화를 좀먹고 있느냐면 이들은 단순히 양념이나 감초 수준의 조역이 아니라 영화의 초반부와 후반부의 메인 에피소드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캐릭터인데다, 이 에피소드들이 상기 언급했던 전형적인 어거지로 감동 짜내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강현수의 병수발씬에서 부친상, 일구일생일구일사로 이어지는 시퀀스는 이 무슨 고릿짝 거인의 별 시절에나 어울릴 듯한 아주 촌스러운 연출이고, 데뷔 후 한 경기도 못 뛴 백업포수가 갑자기 첫타석에서 동점포를 작렬시킨다는 클라이막스씬은 너무나 영화적이라서 도리어 영화를 망쳐 버렸다. 더욱 치명적인 건 후반부 40분 이상을 차지하는 경기씬에서 이 박만수 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경기장면이 도를 지나친 허구적 연출이라서 보는 내내 도저히 몰입할 수가 없었다. 이 KBO 역사에 길이 남을 2대2 15회 연장승부가 결국 영화에서는 2대2 스코어만 동일할 뿐 경기 내용은 완전히 그냥 감독(인지 시나리오라이터인지 모르겠지만) 멋대로 다 바꿔 놨는데 이 분량이 40분 이상을 넘어가니 전반부에서 억지로 짜낸 감동을 후반부에선 마치 무슨 짤순이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더 뽑아내려는 의도가 느껴진달까. 어찌 이 기가 막히게 훌륭한 소재를 가지고 이 따위로밖에 못 만드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연장 들어가서 롯데 야수들, 해태 야수들이 갑자기 죄다 다이빙캐치, 슬라이딩캐치, 워닝트랙 점핑캐치를 일삼을 때는 이 무슨 프야매, 마구마구도 아니고 헛웃음이 나올 지경.

그나마 결말부에 풀스코어로 흘러나오던 '그것만이 내 세상'이 워낙에 명곡인지라 이 엉터리로 능지처참당한 명승부를 위로해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전인권 아저씨가 사람은 참 이상하지만 들국화 때가 죽이긴 죽였다 진짜.

감독의 떨어지는 역량 탓에 가장 손해를 본 건 주연을 맡은 조승우인데, 대단히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영화 자체가 개판이라 완전히 빛이 바래버렸다. 이는 양동근도 마찬가지. 조승우만큼은 아니어도 특유의 능글대는 제스쳐가 은근히 선동열 젊었던 시절이랑 매치가 돼서 이 주역급 2인 캐스팅은 아주 좋았다고 보는데 그저 시나리오가 안타까울 뿐. 최동원, 선동열의 라이벌전을 그린 영화라기보다는 최동원 쪽에 비중이 6대4 내지 7대3 정도로는 기울어져 있는 거의 최동원 전기영화에 가까운 물건이라 조승우의 역할이 크게 요구되는 영화인데, 원래도 연기 괜찮게 하는 배우긴 하지만 군대 갔다 와서 더 원숙해진 느낌이 든다.

근데 이 조승우와 양동근을 제외하면 다른 배우들은 영 맘에 안 드는데, 상기 언급했던 최정원은 아예 없는 게 더 나았을 배역이고 김응룡을 손병호가 맡았는데 이것도 완전 에러다. 룩스도 전혀 김응룡 같지 않고 카리스마도 안 나온다. 풍채로 치면 적어도 장항선 정도는 되어야 제격이고 위압감 뿜어 내려면 김기현이 딱이었을 거 같은데, 이건 뭐 완전한 미스캐스팅.

사실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내내 들국화 노래 빼고는 죄다 까고 싶은 장면들 뿐인데,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영화 시작할 때 자막으로 뜨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했다'는 부분이 낮뜨거울 지경이다. 이렇게 만들 꺼면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했다거나 '재구성'했다고 해야지 스코어 빼고 디테일한 부분은 팩트를 모조리 바꿔 놓고도 저런 텍스트를 영화 시작할 때 띄웠다는 건 대놓고 면피하겠다는 느낌마저 들어서 영화 끝날 때는 더 화가 났다.

크게 강현수, 박만수, 여기자만 까서 그렇지 그 밖에도 버스 태우고, 철창 오르고, 정치권 깐죽대고 등등 어거지 픽션 시퀀스가 줄줄이 계속 터져 나와서 이걸 실화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 해도해도 너무했다 정말.

뭐 재밌었다는 사람들, 감동적이었다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은데 난 영 아니올시다. 영화를 다큐로 만들라는 건 아니지만 다 정도가 있고, 선이 있는 거다. 더군다나 최동원 감독 타계한지도 얼마 안 됐는데 고인의 추억할만한 명경기를 이 모양으로 윤색해 놨으니 내가 롯데 골수팬이었다면 더더욱 분노했을 것 같다. 여담이지만 김용철은 또 왤케 이상한 캐릭터를 만들어 놨는지. 최동원 띄우려고 반동인물화시킨 거 같은데, 참 촌스럽기 그지 없는 연출 방식이다. 80년대 배경이라 일부러 촌스럽게 찍었다면 할 말은 없지만서도. 김용철한테 아마 동의는 얻고 시나리오 썼을 꺼 같은데, 행여나 동의없이 찍은 거면 김용철이 명예훼손으로 고소해도 할 말 없을 듯.


결론적으로 셜록홈즈 그림자게임은 내 취향과는 안 맞아도 까고 싶진 않은데, 퍼펙트게임은 프로야구 광빠임에도 대차게 까고 싶을 뿐. 조승우, 양동근의 호연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by Lucier | 2011/12/26 22:03 | Movie | 트랙백 | 덧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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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Yann at 2011/12/27 03:10
동감합니다...
윽,,
Commented by Lucier at 2011/12/28 03:32
뭐 재밌다는 분들도 많이 계시더군요. 근데 개중에 정말 박만수가 홈런 날려서 연장 간 걸로 아는 분이 계실지도.

암튼 저는 조승우, 양동근 연기 빼고 스토리텔링 면으로는 최악이었습니다.
Commented by 충격 at 2011/12/27 16:24
시작할 때 나왔던 부분이라 정확하게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신 것 같은데... 시작할 때의 문구는 '실화를 바탕으로 극화(劇化)' 했다고 나옵니다.
이건 원하시는대로 각색이나 재구성에 가까운 뜻이지, 실화를 바탕으로 사실 그대로 옮기려 노력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Commented by Lucier at 2011/12/28 03:32
사실 뒷부분 어휘보다도 '실화를 바탕'이란 부분이 몹시 거슬렸던 거라 말이죠. 지적은 감사드립니다.

아무튼 저건 극화라기도 뭐하죠. 윤색일 뿐. 도입부 대륙간컵이랑 선동열 MVP 수상장면 정도 빼고는 죄다 멋대로 바꿔놨는데...
Commented by ... at 2011/12/27 20:37
한국에서 스포츠물 하면 뻔히 이렇지
Commented by Lucier at 2011/12/28 03:33
사실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Commented by Foxtrot at 2011/12/27 20:49
감독이 망친 영화를 돌아가신 최동원 감독님과 기아의 선동열 감독님이 살려놓은 꼴. 베이스가 되는 스토리가 한국 야구에 길이 남을 명승부였기에 망정이지 순수 픽션이었으면 제대로 망했을 영화.. 특히 정치드립은 최악중에서도 최악이었음. 그게 당최 왜 들어간거지;;;;;
Commented by Lucier at 2011/12/28 03:34
최고급 횟감 사다 놓고선 프라이팬에 기름 둘러 튀겨 버린 느낌이랄까요.

박만수, 강현수, 여기자, 정치권 죄다 구리죠 아주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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