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피니시드
개봉한 지는 얼마 안 됐는데, 시사회 때 근 한달 전 쯤 본 거라 슬슬 가물가물해질 타이밍에 그래도 제법 괜찮았던 물건이라 감상 남겨 둔다.
나름 스포일러가 치명적일 수 있는 유형이라, 내용 포함은 되도록 삼가려고 하지만 그래도 주의 요망.


CIA나 MI6, SIS, KGB 등을 소재로 한 영화는 흔히 찾아 볼 수 있지만 모사드 요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는 처음 접하는 것 같다. 적어도 전에 모사드 나온 영화 본 기억은 없으니. The Debt 라는 이스라엘 영화를 리메이크했고 원제도 그대로 The Debt인데 데트나 더 데트로 타이틀을 때리면 어감이 별로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언피니시드라는 제목으로 국내 개봉.

전단이나 트레일러를 보면 헬렌 미렌과 샘 워싱턴을 전면에 깔고 액션 스릴러처럼 포장해 놨는데 실제로는 전혀 액션 영화가 아니다. 아주 오소독스한 심리 스릴러물인데, 아마 이거 보고 평 안 좋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액션물인 줄 알고 보러 갔다가 낚인 부류일 꺼다.

텍스트 노벨류의 게임을 즐겼던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을 특정 선택기에 의한 멀티시나리오 형식을 영화적으로 구현하고 있는데, 이런 게임 안 해 본 사람들은 꽤 참신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쩌면 이해하기 좀 어려운 감이 있을 수도 있겠다.

사실 나는 헬렌 미렌이랑 샘 워싱턴이 공연하는 영화인 줄 알고 갔는데 이게 1965년이랑 1997년, 32년의 간극을 두고 과거와 현재를 오락가락하는 스토리텔링이라 헬렌 미렌은 현재에만 나오고 샘 워싱턴은 과거에만 나와서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헬렌 미렌의 과거 배역은 제시카 차스테인이라는 배우가 맡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건진 최고의 수확이었다.

광대뼈가 부각된 약간은 각진 얼굴이면서도 지적인 느낌이 풍기는데 눈망울은 좀 불쌍해 보이면서 목소리는 또 여리여리해서 딱 내 취향. 마스크가 요즘 배우스럽지 않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라 연애물이나 현대물보다는 좀 클래시컬한 영화에 잘 어울릴 것 같다. 얼굴이 닮았다는 건 아닌데 마치 레베카 홀 같은 그런 복고풍의 느낌. 이 런 스타일의 여성이 현실에서 눈앞에 나타나면 너무 부담스러워서 멀리할 것(...) 같은데 스크린상으로 접하면 너무 좋다.

얼마 안 있어 개봉하는 칸에서 황금종려상 탄 트리 오브 라이프에 브래드 피트 부인으로 나오던데 제시카 차스테인에 푹 꽂힌지라 이것도 꼭 챙겨볼 생각. 역시 곧 개봉할 헬프에도 나오던데 여기선 주연급은 아닌 듯 해서 볼까 말까 생각 중이고.


샘 워싱턴은 제시카 차스타인에 비해 별로 언급할 꺼리가 없는데, 마스크 자체도 그냥 기존 액션물에 출연하던 그것과 다를 게 전혀 없고 캐릭터도 과묵함으로 일관하는지라 그냥 어 샘 워싱턴이구나 잘 생겼네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정작 과거 파트에선 나치 전범으로 등장하는 아저씨가 진짜 연기가 쩔어 주시고, 전체적으로 현대 파트에 등장하는 노땅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하다. 헬렌 미렌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남자 배우들도 비중은 크지 않지만 임팩트가 확실하다.

러닝타임 비중 배분을 보면 한 7대3 정도로 과거 파트가 많은데, 현재 파트가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 건 헬렌 미렌을 비롯한 장년급 배우들의 호연 덕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결말부의 매조지를 제외하면 스토리텔링의 대부분은 과거 파트에서 진행되는데, 중간중간 약간의 액션씬이 등장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상기 언급했듯이 철저하게 심리 스릴러물이라서 전단이나 트레일러만 보고 총싸움을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면 대체 이게 뭔가 할 수도 있겠다.

뭐 대충 30분 정도 보면 후반 전개가 예상은 쉽게 되는데, 그래도 스포일러를 접하면 몰입도가 대폭 떨어질 유형이라 스토리텔링에 대한 언급은 딱히 안 하겠지만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세트를 활용하면서도 60년대 동독의 폐쇄적이면서 묵직한 느낌을 아주 잘 살리고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참 만족스러웠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니 촬영 스팟들이 다 협소한 편이고 해서 로케 관련으로는 제작비가 별로 안 들었을 것 같은데 영화 보는 도중에는 스케일이 작다는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중간에 제시카 차스테인 찬양을 좀 하긴 했지만, 이 영화의 원탑은 누가 뭐래도 헬렌 미렌인데 상대적으로 비중이 떨어지는 현재 파트에 등장했음에도 그 아우라는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더불어 클라이막스에선 노구를 이끌고 액션까지 시현하시는데 의외로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고 그럴싸해서 역시 짬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달음.

액션물인 줄 알고 낚인 사람들 때문에, 국내에서의 평은 전체적으로 좀 별로인 것 같은데 충분히 괜찮은 완성도의 심리 스릴러물이니 내리기 전에 보실 분들은 챙겨 봐도 괜찮을 것 같다.
요 밑에 포스팅했던 어브덕션 같은 물건이랑 비교하자면 송구스러울 정도로 잘 만들어진 영화.

by Lucier | 2011/10/16 20:58 | Movi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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