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 스틸
다음 주 개봉 예정인데, 유료로 틀고 있는 곳이 좀 있어서 며칠 전에 슥 감상.
별 기대 안 하고 순전히 킬링타임용으로 봤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아서 감상평을 남겨 본다.

워낙 오소독스한 일직선 스토리텔링이라 스포일러의 의미가 거의 없는 물건이긴 한데, 어쨌든 요 밑으로는 내용 누설 포함.



이 영화의 배경은 2020년의 미국인데, 그렇다고 해서 근미래적인 분위기나 사이버펑크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다. 오히려 아주 전형적인 80~90년대 극복형 액션영화의 플롯을 답습하고 있는데, 뭐랄까 예전 드래곤볼이나 유유백서 연재될 때 쯤의 소년점프에 수록되면 딱 어울릴 듯한 그런 느낌.

영화를 보고 있자면 소품들을 통해서도 알게 모르게 복고풍 테이스트를 뿜어내고 있는데, 휴 잭맨은 도입부 씬부터 버드와이저를 병나발로 빨아제끼고 있고, 중간에 등장하는 아들내미(실질적 주인공)는 밴 헤일런 티셔츠를 걸치고, 닥터페퍼를 십수병씩 마셔 대면서 카페인 타령을 한다. 복싱 씬도 주체만 사람에서 로봇으로 바뀌었을 뿐 전통적인 라스베가스식 등장씬이나 ESPN(HBO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긴 함)의 중계화면 등은 이게 대체 무슨 2020년이냐 마빈 해글러 짱먹던 시절이래도 믿겠구만 싶을 정도. 무엇보다도 주동인물인 휴 잭맨이 로봇 복싱 매니저로 살아가고는 있지만 과거 복서 시절을 노스탤지아로 깔고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스토리텔링도 괜시리 비비꼬는 거 일절 없이 문자 그대로 쫙쫙 달리는 고속도로식 진행인데, 2시간 좀 넘는 러닝타임이지만 대충 초반 20~30분만 보면 앞으로 어떻게 될런지 뻔히 예상이 가고 실제로도 그 예상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이 펼쳐지기에 이것저것 짱구 굴릴 것도 없이 그냥 가뿐한 마음으로 카타르시스만 즐기면 된다.

휴 잭맨의 최근 영화들은 좀 실망스러운 것들이 많았는데, 이 리얼 스틸에서는 특유의 마초적 매력이 폭발하면서도 아들사랑 감정 연기가 잘 어우러져서 나이스캐스팅이었고, 아들내미 꼬맹이도 참 똘망똘망하면서도 반항적인 맛이 있는 게 내가 엔간하면 남자애 배우들은 안 좋아하는 편인데 얘는 꽤 맘에 들더라. 휴 잭맨 사부의 딸이자 로봇 복싱 후원자 겸 여친 비스무리한 좀 애매한 포지션의 여주가 등장하는데 이 언니가 또 스타일도 좋고 마스크도 이뻐서 굿. 같이 본 친구 말로는 로스트에서 여주급이었다는데 난 로스트는 제대로 안 봐서 잘 모르겠고, 허트로커에서 가이 피어스 죽고 새로 온 팀장 부인으로 나왔던 그 배우. 에반젤린 뭐시기였던 거 같은데.

더불어 악역들도 무늬만 악역이지 뭔가 고약하게 치팅을 한다거나 주인공들을 괴롭히기보다는 그냥 남자답게 한 판 붙고 깨지면 깔끔하게 짜지는 전형적인 소년만화 에너미 캐릭터들이라 뒷맛이 아주 깔끔하다. 생각해 보니 악역이라기보단 그냥 반동인물들.

우연히 습득하게 된 스파링용 로봇이 헌신적인 트레이닝을 통해 실력을 쌓아 누구에게나 무시당하던 언더독에서부터 삼류대회를 거쳐 결국에는 챔피언십을 벌이게 되는 거의 클리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의 교과서적인 스토리텔링인데, 요즘처럼 골머리 썩히는 반전물이 판치는 시대에 가끔은 이런 정직한 물건도 충분히 미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중간중간 일본 콘솔 게이머라면 끄덕거릴만한 개그컷도 등장하고, 뭣보다 액션 자체가 꽤나 본격적이라서 보는 맛이 있다. 중간중간 태클이나 슬램 계열의 레슬링 기술이 잠깐씩 나오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입식 타격도 아닌 클래식 복싱이라서 펀치 컴비네이션 위주의 액션이 펼쳐지고, 리치나 스텝 등의 복싱 요소들이 제법 디테일하게 표현되어 있어 메카닉 액션이라기보다는 권투영화 보는 느낌으로 볼 수 있다. 로봇들끼리 싸운다고 해서 빔을 쏘거나 공중부양을 하는 게 아니라 살과 살...은 아니지만 나사와 조임새가 부딪히는 육박전이라는 얘기. 근접 카메라 앵글이나 사운드도 빠방해서 박진감 넘치고 뭣보다 타격감이 아주 훌륭하다. 메카닉이 CG 느낌이 아니라 진짜 묵직한 쇳덩어리 느낌이 나서 더더욱 근미래물이라기보단 예전 액션물 기분이 든다. 여담이지만 사실 리얼 스틸에서 근미래감을 제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극중에 등장하는 북두의 권 헤어스타일의 깔아 주는 조역 캐릭터들.

감독은 나이트 앳 더 뮤지엄(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를 연출했던 숀 레비인데 숀 레비 스타일이라기보단 오히려 스티븐 스필버그 예전 영화 분위기다. 참고로 스필버그가 총제작.

음악은 딱 이런 영화 BGM 잘 만들 듯한 대니 엘프먼이 맡았는데 시종일관 시원시원한 음악들을 잘 뽑아 주고 있다. 특히 엔딩 타이틀은 뭔가 클래시컬한 권투영화 배경음악 풍이면서도 신쓰가 전위적으로 버무려져 있어서 참 인상적이었다. 시간 급한 분들 아니면 영화 끝나고 바로 일어나지 말고 스탭롤 좀 보다 나가도 괜찮을 듯.

개인적으로는 이런 영화엔 록키 풍의 정통 하드록 넘버가 삽입됐으면 무척 어울렸을 꺼라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적 배경이 2020년인데다 주인공 로봇이 부처핸섬~하면서 춤사위를 벌이는 시퀀스가 반복되는 터라 힙합/테크노 계열의 넘버가 많이 깔려 있다.

크리스탈 메소드 곡들이 다수 들어가 있고, 그 밖에 에미넴, 프로디지, 푸 파이터즈, 톰 모렐로 등 걸출한 아티스트들의 넘버가 삽입곡으로 포함.


사실 극전개가 너무나도 뻔하고 단순한 지라 뭔가 꼬아놓은 복잡한 구성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중에 대표주자가 사실 나지만)이라면 좀 꺼려할 수도 있겠는데, 반면에 정직한 직구승부 영화 선호자에게는 하반기 최고의 블록버스터가 되리라 확신한다.

솔직히 논리적으로 개연성 따져가며 트집을 잡자면 말이 안 되는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긴 하지만, 굳이 그럴 기분도 필요성도 느껴지진 않는다.

영화 보면서 좀처럼 감정이입하는 경우가 안 생기는 편인데, 라스트씬에서 음성지원 시스템 작살나고 동작인식 시스템으로 전환해서 휴 잭맨이 섀도우 복싱 휘날릴 때는 나도 모르게 순간 울컥하더라. 좀 관객들 꽉 들어찬 상영관에서 와아~하면서 봤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보기 드문 영화인데, 거의 텅텅 빈 데서 봐서 좀 안타까웠을 정도.

아이맥스로도 상영하던데, 개봉하면 함 다시 볼까 생각 중. 아이맥스로 봐도 별 메리트 안 느껴지는 아이맥스용 영화들이 수두룩한데 이건 초대형 스크린으로 보면 진짜 신날 것 같다.


P.S> 이거보다 좀 더 장문으로 주절댔던 거 같은데, 병신같은 이글루스가 글 올리기 하니깐 갑자기 먹통 되면서 임시저장도 없이 텍스트를 통으로 날려버려서 씨발씨발거리면서 다시 작성한 포스트라 어딘가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올린다.
by Lucier | 2011/10/09 19:10 | Movi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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