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라이딩 후드
난 그림동화 팬덤...이라고까지 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림동화를 상당히 좋아한다. 물론 아동용으로 윤색된 권선징악 메데따시메데따시 교훈적인 그림동화 말고 착한놈도 막 죽어나가고 나쁜 놈은 죽기도 하고 잘 살기도 하는 원전 쪽을 좋아하는데, 독일어판은 능력밖이라 못 보지만 영문판, 일본어판 막 찾아서 보고 예전에 백천사에서 나온 잔혹동화로 각색한 만화 시리즈도 구해서 보고 했던 게 한창 학창시절.

영화 그림 형제 개봉했을 때는 너무 기대가 커서 개봉하고 바로 봤는데, 아니 히스 레저, 맷 데이먼에 모니카 벨루치를 여주로 쓰고 감독이 무려 테리 길리엄인데 어찌 이리 망작이 나왔나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아 진짜 테리 길리엄이 이런 뽠타스틱 괴영화 만들기엔 딱 맞는 영감님인데...근데 극장에서 그렇게 분노하고도 듭드 나오니깐 다시 보면 재밌을지도 몰라 하고선 듭드 사서 보고선 또 18거렸다는 건 내가 휘발성 메모리 쪼다라는 반증.

암튼 라푼젤은 왠지 디즈니 테이스트 떡칠일 것 같아서 평은 좋음에도 그냥 넘겼었는데 이 레드 라이딩 후드는 뽕빨물 티가 팍팍 나서 평이 개판임에도 개봉 주말에 바로 보러 갔었다.
이게 뽕빨물임을 직감한 건 바로 이 전단 때문인데, '빨간 모자야, 사랑에 빠지지 마...' ㅋㅋㅋㅋ 아 진짜 너무 대박이다. 이 카피 누가 생각해낸 걸까. 손발이 오글거리는 것도 이 지경에 이르면 되려 유쾌할 정도.

이 밑으론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으니 패스할 분들은 패스하시고...


보통 우리나라에선 번역본이 빨간 모자 내지 빨간 망토로 되어 있지만 일본쪽 텍스트를 보면 대개 아카즈킨, 즉 빨간 두건으로 되어 있고 나도 예전부터 빨간 두건이 입에 익어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데(사실 차차도 빨간 두건 차차인디) 암튼 타이틀이 빨간 모자..이러면 너무 좀 그렇다 싶었는지 원제인 레드 라이딩 후드를 그대로 따 왔다. 하긴 포스터 저렇게 뽑아 놓고 빨간 모자 이렇게 찍혀 있었으면 좀 안 어울리기도 하는데 나는 괴스럽다고 더 좋아했겠지.


전설 속의 치명적 사랑 어쩌고 적혀 있어서 난 행여 로맨스물일까 약간 걱정했는데, 보다 보니 그런 우려는 싹 사라지고 신나게 웃을 수 있었다. 이게 코미디는 전혀 아니고 개그씬이 터지는 것도 아닌데,(사실 웃기려고 작정한 씬은 단 하나도 없는 듯) 뭔가 전개가 휙휙 막 지나가는 게 뜬금없고 쿠소해서 보면 웃긴다. 설명하기는 힘든데 진짜 웃긴다 대사도 그냥 막 던진다.

아만다 사이프리드 하나만 믿고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 같은데, 굉장히 이쁘게 나온다. 사실 사이프리드 양이 최근 대세라곤 하지만 내 개인적 취향으론 출연작마다 기복이 극심했는데 맘마미아에선 별로였고, 클로이에서 완전 너무 이뻤다가 레터스 투 줄리엣에서 다시 실망했는데, 레드 라이딩 후드는 클로이 바로 아래수준으로 미모를 뽐낸다. 그래도 머리만 좀 내리면 더 좋았을 텐데 뭐 이 마을 여자들이 죄다 올백이니 그러려니 해야지. 근데 사이프리드는 진짜 이마 좀 가리는 게 훨씬 더 낫다. 디어존을 함 보긴 봐야 되는데..

감독이 캐서린 하드윅인데 아니나 다를까 트와일라잇 시리즈 연출했던 아줌씨답게 좀 난잡하다 싶을 정도로 현란한 스테디캠 사용으로 정신없는 분위기를 뿌려 대면서 배경음악도 막 MTV라도 보는 듯이 머리아프게 시끌벅적하고 이게 참 세트도 묘한 게 뭐랄까 독일 산골 마을이라기보단 무슨 미주리주 개간지 같은 묘하게 신대륙적으로 황량한 그런 느낌. 중간에 늑대 잡았다고 축제 벌이는 씬이 상당히 길게 나오는데 이것도 그림동화 분위기가 아니라 뭐랄까 광년들 설치는 디오니소스 주신제 내지는 아이티 부두교도들이 콜 오브 크툴루 코스프레라도 벌이는 듯한 기괴한 시퀀스로 일관해서 으악 이게 뭐야 하면서도 솔직히 난 너무 신났다.

사실 제일 웃기는 장면 많이 선사해 준 건 사제로 나오는 게리 올드만인데, 배역이 너무 찌질해서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중간에 계속 외쳐 대는 'God is Stronger!!!'는 최근 들어본 영화 대사들 중에 단연 최고로 빵빵 터졌다. 아오 일라이에서도 좀 이런 병신같은 캐릭터로 나와서 안쓰러웠는데 연이어 이런 배역이라니, 올드만 아저씨 짬밥에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기도. 얼른 다크나이트 라이즈 나와야 적어도 내 뇌내에서는 좀 만회가 될 것 같다. 하긴 근데 난 고든 봐도 자꾸 네드 플랜더스 생각나서 속으로 낄낄거림.ㅋㅋ

암튼 올드만 옹이 참 찌질하게 구시다가 그래도 끝에는 살신성인으로 퀘스트용 아이템을 떨구시는데, 이 연출이 어설픈 듯 하면서도 또 나름 꽤 인상적이다. 아 그리고 올드만이 데리고 다니는 흑형 2형제가 단역까진 아니고 그래도 좀 비중이 있는데 이 형이 쫌 억울하게 요한 주루(...)를 닮아서 난 또 속으로 웃음 참느라고 참 힘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냥 일반적으로 영화 보는 사람들은 웃기는 구석이 전혀 없는데 나만 계속 꺽꺽대면서 웃음을 참아서 주변 사람들은 이상하게 봤을지도.

상기 언급했지만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미모는 군계일학이라기도 모자랄 정도고 그냥 마을 안에 무슨 운석이라도 떨어지면서 갑툭튀한 마냥으로 이질감이 느껴질 수준. 다른 여캐들이 좀 나오는데 사이프리드 비하면 다들 코미디언처럼 생겨서 이게 또 웃긴다. 친구 캐릭터 한 명이 올드만한테 동생 살려달라면서 뇌물을 바치다가 안 먹히니깐 갑자기 옷을 벗는데 이 때도 웃겨 죽을 뻔.ㅋㅋㅋㅋ

거기다 사이프리드를 노리는 젊은 남캐가 둘 나오는데 얘네도 참 사이프리드가 너무나 아깝게 느껴질 정도의 별 멋대가리 없는 룩스라 마을 전체에서 사이프리드 혼자 고고하게 미모를 떨치는 와중에 중간에 할머니한테 결혼 선물이라며 빨간 망토까지 얻어 걸치고 다니니 우중충한 색감 속에 악마의 색(올드만 曰)으로 몸을 감싸고 미친X 마냥 막 쑤시고 댕기니 초현실적인 감마저 들었다.


사실 제일 맘에 들었던 건 시나리오 전개인데, 이게 그냥 정석적인 영화 분석의 시각에서만 보면 통일성도 없고 설득력도 부족한 데다 괜히 어설픈 떡밥에 결말은 황당무계일 수도 있는데, 원래 그림동화는 쫌 이런 막 나가는 맛이 있어야 제격이다. 아니 내가 유키 카오리적 사고방식에 너무 쩔어서 나만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암튼 나는 좋았음. 유키 카오리 아줌씨가 이 영화를 볼 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꼭 한 번 권해주고 싶다. 블로그 가서 추천이라도 해 볼까.(덧글이 안 달리던 것 같은데) 초중반까지 로맨스 라인 타나 싶다가 중반 이후로 게리 올드만 슬랩스틱 작렬과 함께 뽕빨로 막 나가는데 트와일라잇도 괜히 염장질로 가지 말고 이렇게 뽕빨물로 나갔으면 훨씬 재밌었겠다 싶기도 함. 하긴 근데 트와일라잇이야 원작 팬덤도 어마어마하니 무리가 있긴 하겠다. 그림 동화야 원작물이라곤 해도 이젠 거의 공공재(?) 느낌이라 아무래도 좀 자유로웠겠고.


뭐 반전도 있긴 하고 스릴러 요소도 깔려 있고, 연애 라인도 탑재, 약간의 액션, 괴수물 요소도 섞였고 여러모로 잡탕인데, 그런 각각에서 뭔가 퀄리티나 재미를 찾으려면 그저 망작일 뿐이고 그냥 뽕빨물로 보면 정말 재미난다. 어케 맨날 뻑뻑하게 블랙스완 같은 거만 보고 맨날 감동적으로 킹스 스피치 같은 거만 보고 사나 좀 이런 어이없게 웃기는 것도 보고 살아야지.

..한마디로 루드비히 혁명스러운 잔혹동화 계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강추. 블루레이는 설마 안 나올 꺼 같고 듭드 나오면 살 꺼다.
by Lucier | 2011/03/29 23:02 | Movie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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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zoo at 2011/04/04 17:30
앜ㅋㅋㅋ 소감만 봐도 막 터짐. 함 볼까 어쩔까 아직 하나 몰겠네요. 올드만 옹 네드 플랜더스.ㅋㅋㅋㅋ
Commented by Lucier at 2011/04/05 09:33
그래도 관객 쫌 드는 것 같던데...아직 내리진 않았을 듯?? 내가 보기엔 님 취향에 상당히 부합할 듯.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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