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모리스
스포일러가 섞여 있을 수 있으니 백지 상태에서 영화 보실 분들은 알아서 피해 가시기를 권장.


주말에 스플라이스를 보려다가, 약속이 깨지고 시간도 영 애매하게 안 맞아서 에라 꿩 대신 닭으로 본 필립 모리스.

타이틀만 봐서는 무슨 담배회사 홍보 다큐같은 느낌이지만, 사실은 짐 캐리 횽이랑 이완 맥그리거 횽이 나오는 코미디 영화...인 줄로만 알았다. 표 끊을 때까지만 해도.
그러니깐 트레일러 영상 같은 건 본 적이 없고 저 국내용 포스터만 전에 봤던 기억이 있는데 오렌지색 코스츔이 꽤나 강렬하면서 사기꾼, 코믹 탈옥 어쩌고 적혀 있길래 아 짐 캐리랑 이완 맥그리거가 작당해서 탈옥하는 로드무비 정도 되나 보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화 시작하고 나서 10분 정도 지나니까 어어 하다가 20분 쯤 흐르고 나선 내가 생각했던 영화가 전혀 아니라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이거 혼자 봐서 참 다행이란 느낌이 팍팍 들었다.

이게 주연 둘이 게이 커플인데다 그 밖에도 게이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렇다고 해서 뭐 퀴어 무비 같은 건 전혀 아니지만서도. 근데 과격하진 않지만 씬도 제법 나오고 해서 친구끼리 보면 민망하고, 가족끼리 보면 더욱 민망하며, 연인끼리 보면 그나마 좀 나을 것 같긴 한데 어쨌든 혼자 보는 게 최고인 듯.

그러고 보면 티켓팅할 때 어째 18세 이상 관람가라 아니 코믹 탈옥기라면서 대체 왜 R인 걸까 간수라도 잘근잘근 썰고 나오나(설마?) 혼자 좀 의아했었는데 주인공들이 게이였다니.

사실 소재가 워낙 파격적이라서 그렇지 영화 자체로만 놓고 보면 꽤나 괜찮다. 수미상관에 1인칭 나레이션을 좍좍 깔아대고 도입부가 유년기 회상으로 시작되는 연출 등은 개인적으로는 참 맘에 안 들어하는 전개 방식이지만 이 영화에선 스티븐 러셀(짐 캐리)의 1인칭적인 관점이 스토리텔링상 주도적인 롤을 맡을 수밖에 없는 터라 뭐 그냥 납득.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원래 타이틀은 필립 모리스(이완 맥그리거)가 아니라 I Love You Phillip Morris 였는데 이게 꽤나 의미심장한 네이밍이라 국내 제목도 알라뷰 필립 모리스가 되어야 하지 않았나 좀 아쉬운 감도 든다.

모든 것이 거짓으로 점철되어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는 스티븐 러셀에게 있어, 오직 확실한 아니 불확실하더라도 확신하고픈 아이덴티티는 필립 모리스와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그러한 필립 모리스를 사랑하는 나뿐이었으니까.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이 영화가 접근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낭만을 쫒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전적인데, 그 어떠한 가변적인 개념과 상황들 속에서도 가치불변의 절대성은 존재한다는 구닥다리 먹물쟁이들이 좋아할 법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곳곳에 소소한 개그 요소가 깔려 있고 짐 캐리가 늘 그렇듯이 그야말로 적재적소에 딱딱 맞아 떨어지는 감칠맛 나는 액션을 취해 주기 때문에 보면서 의외로 억지스럽게 느껴지진 않는게 또 포인트. 똑같이 불치병 네타에 질질 짜도 역시 일본식 최루물과는 격이 다르다. 아니 뭐 이 영화는 애시당초 전혀 최루물이 아니긴 하지만 암튼..


나는 사실 코미디물이라면 아예 시니컬하게 까는 블랙코미디나 벤 스틸러 류의 조금은 썰렁한 듯한 양키 개그를 선호하고, 짐 캐리 영화에 국한해서 봐도 초기의 안면근육 개그, 화장실 개그를 바탕에 깔고 슬랩스틱으로 달리는 것들을 더 좋아했던 편이라, 그러니깐 출연작으로 꼽자면 트루먼 쇼나 이터널 선샤인 같은 작품들이 한층 더 완성도 높은 영화겠지만 그냥 낄낄 웃고 즐기기엔 에이스 벤츄라, 마스크, 덤 앤 더머 시절이 짱이라는 얘기.

고로 이런 나름 본격적인 자아성찰물(그것도 게이들이 벌이는)인 줄 알았다면 굳이 찾아서 보진 않았을 것 같은데 달리 생각해 보면 이럴때 아님 또 짐 캐리랑 이완 맥그리거가 부비부비 입박치기를 하며 끊임없이 밀어를 속삭이는 장면을 또 언제 볼 수 있었겠나 싶어 그냥 색다른 경험했다고 생각 중. 뭐 쌍화점에서 주진모랑 조인성이 그야말로 지저분하게 쪽쪽 빨아댔던 걸 생각하면 이 쪽은 그냥 애교 수준이기도 하고. 뭣보다 포스터에 저 '천재 사기꾼의 황당한 코믹 탈옥기'란 카피는 낚시성이 매우 다분하다. 동성애 요소를 배제하더라도 이건 코미디라기보단 드라마 쪽이 한 3 : 7 정도로는 비중이 무거운 느낌이라.

이완 맥그리거는 최전성기(?)에 비하면 아무래도 마스크에 연륜이 좀 묻어 나긴 하지만 정중동이랄까 뭔가 시종일관 활개치고 다니는 짐 캐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분하면서도 표정이나 짜는 연기가 꽤 멋들어진다. 한 마디로 캐스팅은 굉장히 훌륭하다.

러닝타임은 100분도 채 안 되니 단촐한 편인데 의외로 구성은 꽤나 오밀조밀해서 제법 길게 느껴진다. 반전 아닌 반전, 트릭 아닌 트릭들도 사실 영화 끝나고 보면 별 거 아닌데 1인칭이 짐 캐리다 보니 낚이기 딱 좋고. 짐 캐리의 전작이었던 예스맨처럼 긍정의 힘을 팍팍 주는 물건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보고 나서 여운이 많이 남았다. 아마 일반인 코스프레에 익숙해진 덕후들은 다들 조금씩은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굳이 나 자신을 위한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한 내가 된다 하더라도 그 누군가에게 진정성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자신의 일부로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 않을까.

여담이지만 스탭롤 보면서 그야말로 엄청 깼던 대목이 있었는데 글쎄 짐 캐리 전남친 역으로 나왔던 배우가 무려 로드리고 산토로.
로드리고 산토로 하면 누군지 감이 오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무려 300에서 크세르크세스.(으악)

아 진짜 이름 올라가는 거 보면서 깜놀했다. 영화에서 꽤나 이쁘장(...)하게 나오고 눈물 연기까지 작렬시켰는데 알고 보니 크세르크세스였어.ㅋㅋㅋㅋ
뭐 근데 가만히 다시 떠올려 보니 묘하게 물기 머금은 눈매나 턱선 같은 게 은근 크세르크세스였던 것 같기도 하고. 헤어스타일이 워낙 표변해서 전혀 못 알아봤지만.


계획도 없이 시간이 맞길래 그냥 대타로 본 영화 치고는 감상까지 이리 장광설로 늘어지는 걸 보면, 알게 모르게 꽤나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정작 보려던 스플라이스는 어째 꼬락서니가 벌써부터 상영회수가 엄청 적은 게 빨랑 안 보면 담주라도 내릴 기세라 얼렁 챙겨 보긴 해야겠는데 과연 볼 수 있으려나.


P.S> 상영전 예고편으로 피라냐가 나왔는데, 이거 원 틀림없이 공포영화라고 찍은 걸 텐데 예고편만 봐서는 너무 웃겨서 개봉하면 한 번 보러 가서 신나게 웃어볼까 생각 중. 3D로 보면 진짜 대박 웃길 듯.
by Lucier | 2010/07/06 21:13 | Movi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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