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후드
나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던 물건이라, 시사회 티켓까지 확보해 뒀었는데 어찌저찌 못 가고, 개봉일날 보려다가 어찌저찌 못 가고 그래도 개봉 담날 감상.

좀 웃겼던 건 CGV 명동에서 봤는데 늘 그렇듯이 10분 동안 보고 싶지도 않은 온갖 광고를 쏟아내다가 기껏 불꺼지고 시작되나 싶더니, 영화사 로고 나오고 '부패한 시대엔 무뢰한들이 판침둥. 12세기 영길리가 바로 딱 such a time 어쩌고 블라블라..' 텍스트가 펼쳐지다 역동적인 1인칭 이동샷이 등장하며 두근두근하려는데 김빠지게시리 불켜지고 스크린이 딱 나가는 거라. 마이 쎄씨 걸(양키판 엽기적인 그녀) 볼 때 광고랑 예고편만 한참 틀다가 정작 영화 본편은 시작도 안 하고 꺼져서 매니저랑 배틀 떴던 적은 있지만 이렇게 시작해서 한 몇 분 나오다가 꺼진 건 또 난생 처음.

매니저 같은 사람이 와선 디지털 소스가 어쩌고 저째서 자막이 안 떠서 죄송하고 어쩌고 다시 상영하겠음 어쩌고 하더니 또 한 10분을 잡아 먹어서 결국은 정상 상영시간보다 20분은 딜레이되어 시작. 하긴 텍스트 자체도 고풍스러워서 얼렁 바로 눈에 안 들어오는데 이걸 자막도 없이 그냥 해석하면서 보라는 건가 열나 당당한데? 싶기는 했다만..


한창 상영 중인 블록버스터이니 굳이 뭐 여기다 스포일러성 얘기를 풀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아무튼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야말로 우직하고 오소독스하고 클래시컬한 연출이라 정통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어필할 듯한 느낌. 각본 자체는 실제 역사와는 판이한 부분이 매우 많아서 전혀 오소독스하진 않지만 내가 뭐 영국인도 아니고 필립 왕이 무려 도버 해협을 건너 영길리 해안 상륙작전을 펼쳤던 말던 상관없이 그냥 영화만 재밌으면 그만. 왠지 현지 정통 영국 신사들은 보면서 궁시렁댈지도?

바디 오브 라이즈에선 리들리 스콧한테도 좀 실망했지만 똥배 튀어나온 러셀 크로우가 더 실망스러웠었는데 그래도 로빈 후드가 된 크로우 횽아는 다시금 카리스마를 찾아서 다행. 대놓고 나 주인공이요 하는 망설임 없는 캐릭터라 딱히 연기 가지고 얘기할 건덕지는 없지만 그래도 역시 중후하다.

케이트 블란쳇은 뭐 이름값이 있는 만큼 연기는 매우 훌륭한데, 룩스는 역시 좀 아쉽다. 갈라드리엘은 이쁘장한 룩스보단 박력과 성량이 필요한 캐릭터니 그야말로 딱이었고, 벤자민 버튼 여친 같은 것도 아역도 있겠다, 기본적으로 고뇌에 기반한 캐릭터라 연기로 충분히 룩스가 커버되는데, 로빈 후드 상대역은 시나리오적으로 봤을 때 그냥 먼치킨 주인공 짝꿍 노릇이라 연기 좀 못해도 좋으니 더 아리따웠으면 영화야 어떻게 되든 최소한 난 더 만족했을 듯. 내 취향대로만 캐스팅하라면 에이미 아담스가 좋을 것 같은데 아무래도 너무 유약한 분위기라 무리가 있겠고 기네스 펠트로 정도면 딱이었을 텐데.

..여담이지만 룩스로만 치면 이 영화 최고의 캐스팅은 터크 수사. 진짜 생각했던 이미지 딱 그대로.

마크 스트롱이 고드프리 역을 맡아 스킨헤드 배신자 나쁜 놈을 연기하는데 늘 그렇듯이 그냥 무난한 악역 연기. 사실 주동인물, 반동인물의 성격이 워낙 뚜렷하게 드러나는 정통물이라 딱히 감정의 폭을 드러낼 부분도 없고 표정이랑 액션만 그럴싸하면 되는 캐릭터라서. 그러고 보면 바디 오브 라이즈에서도 마크 스트롱 나왔더랬는데 은근 리들리 사단인 건가.

아 이름은 모르겠는데 바디 오브 라이즈에서 바삼으로 나왔던 배우도 킹 존(라이온하트 동생)으로 등장해서 찌질함을 작렬시킨다. 연기 꽤 괜찮음.


사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큰 이질감이 느껴지는 건 로빈 후드라는 타이틀인데, 암만 봐도 이건 로빈 후드 영화는 아니다. 그냥 마그나 카르타 내지는 러셀 크로우의 대헌장(홍콩 영화냐!) 타이틀 붙이고 나왔으면 더 어울릴 듯한 로빈 후드 (그것도 미약한) 프리퀄 분위기. 그렇다고 해서 뭐 낚였다거나 이런 느낌까진 아니었지만, 그렇다곤 해도 전혀 사전정보 없이 이런 스타일인 줄 모르고 있던 터라 러닝타임 120분 넘어가도록 내가 당초 생각하고 있던 전개인 셔우드 숲에서 노략질하고 사슴 꿔먹는 유쾌한 노리배들은 전혀 안 나오고, 이건 뭐 필립 왕이 배타고 영길리를 향해 진군해 오니 벙찌기는 했다.


액션씬은 역동적이기는 한데 최근 워낙 과격한 액션 영화들도 많다 보니 딱히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고, 그래도 초반의 공성전이나, 클라이막스의 장궁 난사, 기병대 도열, 상륙작전 저지 등 뭔가 딱 12세기말~13세기초 영불 군바리들이 벌였을 법한 국지 전투의 장면들을 아주 정통스럽게 고증하고 있어서 만족. 근데 이런 씬 하나하나를 단편적으로 놓고 보면 300이라든가, 반지의 제왕 등 기존의 블록버스터에서 등장했던 듯한 장면이 많아서 신선한 맛은 거의 없다. 근데 뭐 포스트 서두부터 정통, 정통 얘기하고 있지만 진짜 액션 뿐만 아니라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과정의 전반적인 연출 및 장면전환 사이의 비쥬얼 나레이션씬, 카메라 앵글조차도 완전히 대놓고 너무 클래시컬해서 굳이 신선하지 않아도 그냥 묵은 맛에 볼 수 있는 영화랄까. 한국인으로 치면 맨날 파스타, 버거킹 내지 삼겹살만 달리다가 가끔은 백반에 된장찌개도 맛보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에 보면 되겠다.


암튼 2시간 훌쩍 넘어가는 영화임에도 한 순간의 지루함도 없이 재미나게 봤다. 괜히 어정쩡한 군더더기도 없고 일직선 전개라 시원깔끔.
로빈 후드 팬덤(..이 과연 국내에 얼마나 있을런지는 의문스럽지만서도)들에게는 되려 권하기 힘들겠지만, 우직하고 육중한 정통 서사물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강추.


나올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내가 당초 생각하고 있던 셔우드 숲에서 노략질하고 사슴 꿔먹는 유쾌한 노리배들 스토리텔링으로 후속작이 나온다면 리들리 할배 말고 테리 길리엄이 감독해서 멋대로 막 지르면 엄청 재미난 영화가 될 것 같다.


P.S> 영화 시작해서 바로 사자왕 리처드와 일당들이 불란서 성 때려 부순다고 으쌰으쌰하는 장면이 꽤 인상적인데, 계속 사자왕갑이 떠오르고 베네에서 퀘 받는 건 확실한데 런던 갔다가 보르도 교회에서 캐던가 아님 프랑스 북서부 해안이던가 혼자 막 기억을 더듬어 보는 건 대항온의 폐해. 덕분에 초반엔 제대로 몰입을 못했다.
by Lucier | 2010/05/16 22:10 | Movi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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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bluesoup at 2010/05/16 22:32
리뷰 읽어보니 딱 리들리 스콧 영화 같은 느낌이네요. 육중한 정통 서사...
전 글래디에이터를 보고도 러셀 크로우가 왜 그렇게 양녀들에게 인기가 좋은지 그렇게까지 멋진 것 같진 않은데 배역이 좋아서 그런가 따위의 의문이 남았습니다만 3:10 투유마 보고 반한 케이스라서-_-; 궁금하긴 하네요. 요즘 극장갈 시간 여유가 없어[같이 갈 사람도 없고ㅠㅠ] 근자에 볼 수 있을런지는 의문입니다만..ㅠㅠㅠㅠㅠㅠㅠㅠㅠ
Commented by Lucier at 2010/05/16 22:53
진짜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클래시컬합니다. 연출도 잔재주 같은 거 일절 없고 죄다 직구승부. 저 개인적으론 참 좋았습니다.
로빈 후드 보고 나서 생각한 게 적벽대전 2부작을 리들리 스콧이 찍었다면, 진짜 개쩌는 명작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은.

..반면에 로빈 후드 이 시나리오 가지고 오우삼이 찍었으면 희대의 괴작이 나와서 그건 그것대로 또 매우 유쾌했을 것 같기도 하네요.

쓰리 텐 투 유마 꽤 재밌죠. 개봉할 땐 망했던 것 같은데 얼마 전에 케이블에서 틀고 있더군요.
Commented by saikyo at 2010/05/17 14:30
사자왕은 역시 가오가이거가 제맛...(의불)
Commented by Lucier at 2010/05/17 16:35
그러고 보니 중간에 로빈 후드가 해머(..아님 메이스였나 암튼 둔기삘)도 막 휘두름 잠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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