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82화
근래 연재분 중 가장 따뜻한 느낌의 파스텔톤 도비라.

원래 쿠키는 월말에 나오는 잡지라 국내 서점들 입고일 수틀리면 다음달 초에나 구하게 되는데 이번 5월호는 운좋게 지난 28일에 입고되어 본 지는 좀 며칠 지났다.

사실 나나라는 만화는 단행본 기준으로 했을 때 21권을 축으로 그 앞부분과 뒷부분이 완전히 판이한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는 구도다.

20권 라스트씬에서 렌이 환각 속에 벽으로 돌진했고, 21권이야 뭐 4회 연재분 내내 as dark as it gets 수준의 꾸리꾸리한 스토리텔링.

그렇담 이렇게 남주를 죽여 놓고 그 다음 스토리텔링은 과연 어떻게 진행되어 나갈 것인가 독자들은 당연히 궁금했고, 21권 이후 연재분인 81화는 그래서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81화 얘기는 따로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제법 연출이 담담하면서도 설득력 있어서 좀 안심했달까 그런 기분이었는데 이번 82화를 보고서는 역시 이 만화가 그냥 뻘로 4,500만부씩 팔아치운 작품은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다.

솔직히 렌이 죽었을 때, 난 야자와 아이랑 편집부가 뭔가의 트러블로 틀어졌던가, 야자와 아이가 더 이상 나나를 그리기 싫어졌다던가, 혹은...더더욱 솔직히 말하자면 야자와 아이가 제대로 미쳤던가 뭐 이런 케이스 중의 하나일 것으로만 생각했다. 이 따위로 터뜨려놓고 후속 스토리를 수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81화,82화 2화 분량 연재분을 보고 난 느낌은 도리어 경외감. 이 아줌마 진짜 다 미리 재 놓고 죽인 것 같다. 어지간한 작가라면 이런 파탄 에피소드 이후 전개가 깔끔하게 이어질래야 이어질 수가 없는 게 당연지사거늘, 다크 아우라는 21권 4회분에서 모조리 내뿜고 뭔가 납득할 수 있는 얘기를 다시 전해주고 있다. 물론 여전히 어둡고 슬프고 가라앉은 분위기이긴 하지만, 사실 렌을 죽여 놓고 이렇게 스토리텔링이 이어져나간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거다. 차라리 노부나 신이 죽으면 죽었지 렌은 만화적으로 봤을 때 결코 죽어서는 안 될 캐릭터였기에.

셀 수 없이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 만화지만, 어느 정도 정리된 15권 가량 이후 시점에서 보면 이 등장인물들간의 균형은 렌,타쿠미,야스 & 나나,하치,레이라 이렇게 각각 3명씩의 남녀가 외줄타기식의 밸런싱을 보여 주고 있던 차 그 축 중 하나인, 1권부터 나왔던 남주를 황천길로 보낸 거다.

렌이 사라짐으로써 나나가 무너졌고, 그로 인해 하치가 무너지고, 타쿠미는 따로 무너질 사람은 아니지만 결국 레이라-하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는 힘들어졌음에 대체 어떻게 수습을 해 나갈 것인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81화와 82화에서는 비교적 조역급이라 할 수 있는 아사미를 활용해 아주 매끄러운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82화에선 쉬어터질 대로 문드러진 노부 떡밥을 던져서 또다시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미우-야스 관계와는 달리 노부-아사미 관계는 사실 신뢰라기보단 육욕에 기반한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든 불씨가 터질 수 있던 차에 하치가 기숙사로 들어와 버렸으니 아사미 입장에선 당연히 밸이 꼴릴 수 밖에. 하긴 써 놓고 보니 야스랑 미우도 전혀 신뢰로 뭉쳐진 관계는 아니긴 하다. 현 포지션은 어떻든 간에 그 시발은 미우가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로 야스의 필요에 의해 구축된 관계니.

암튼 82화 쩔어준다. 81화도 참 괜찮았고, 아마 81화부터 시작될 22권은 단행본으로 묶여 나와도 아주 괜찮은 느낌일 것 같다.
대사 센스야 뭐 늘 그랬듯이 발군이고, 컷 쳐 대는 솜씨가 아주 그냥 이젠 거의 오토모 가츠히로급이다. 세상에 소녀만화가 이렇게 컷을 스타일리쉬하면서도 군더더기없이 쳐 내다니. 이제 야자와 아이는 시미즈 레이코, 오카노 레이코, 나리타 미나코의 연출력을 넘어섰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사실 노부-하치 떡밥은 정말 어찌 생각하면 너무 좀 치졸할 정도로 클래시컬 떡밥인데, 이런 진부한 떡밥이 전혀 촌빨 날리지 않고 엄청 세련되게 그려진다는 게 보통 작가로서는 가히 상상도 하기 힘든 일. 갑자기 다른 작가 까서 좀 미안한 감도 있지만 히다카 반리나 타네무라 아리나 클래스의 작가가 만화 십수년 더 그려도 이런 연출은 못 할 꺼다. 반리는 사실 몇년 전이었으면 오히려 가능성 있어 보였는데 요즘 도저히 회복 안 될 정도로 무너져 버려서.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82화의 하이라이트는 정줄놓은 레이라. 와 진짜 순간 섬뜩했다.

..그나저나 안 그래도 안티 세력 판치는 레이라거늘, 이번 연재분에선 영양실조(..를 빙자한 정줄놓음 현상)로 쓰러져 타쿠미의 1:1 간호를 받는 데다 야스랑 나오키까지 와서 떠받드니 또 레이라 까는 사람들은 완전 건수 제대로 잡고 신나게 까댈 수 있을 듯. 저 한 편 숙소 렌 영정 앞에서 청승 떨고 있는 노부-하치 콤비를 보면 상대적으로 더더욱 그렇고. 뭐 누가 뭐래도 레이라 지지파인 나조차도 약간 울컥하더라. 그래도 난 레이라 홧팅임.


렌 죽고 나서는, 길어야 두어권 분량으로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이거 4월호,5월호 연재분 보니 별로 그럴 성 싶지도 않다. 꾸리꾸리한대로 계속 나올 듯. 뭐 그래도 연출력이 완연히 다시 살아났기에 반갑다. 아니 뭐 사실 외적인 연출은 계속 좋았지만 20권~21권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전개였기에.

부디 결말까지 이런 퀄리티로 꾸준히 달려 주길 기원한다.


by Lucier | 2009/04/03 20:08 | Books/Comics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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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리브 at 2009/04/04 21:16
전 레이라를 까는 안티세력이라 레이라를 신나게 까대고 싶지만... 그래도 정줄 놓고 있다니까 불쌍하네요 ㅎㅎ 그래도1:1 간호라니이!!
Commented by Lucier at 2009/04/04 22:12
집사람은 애밴채로 상가집에 가서 모토카레랑 으쌰으쌰하고 있는데, 연락도 한 번 없이 레이라한테 붙어 죽까지 떠먹여 가며 극진히 간호하더군요. 이 만화 진짜 좀 짱입니다.
Commented by zoo at 2009/04/05 01:04
상황이 진짜 그러네요. 애밴채로 상가집에서 모토카레랑 으쌰으쌰. 연재분 봤지만 그런 생각 전혀 못했는데 현실적으로 대입해 보니 정말 막장 시츄에이션이네요.
근데 너무 재밌심. 이번화 연출 완전 짱. 야자와 아이 진짜 좀 쩔어요.
Commented by Lucier at 2009/04/07 23:20
난 조카 땜시도 한동안 상가집 안 가고 못 갔었는데, 우리 하치양은 만삭의 몸으로 상가집에서 거주하니 이거 완전 대인배.ㅋㅋ
Commented by zeno at 2009/05/18 20:10
아.. 나나를 치다가 오게 되었습니다.
나나는 읽으면 읽으수록 빠지고 소름이 돋는 것 같아요..
아 글을 쓴 이유는;; 다른이유인데.. 저도 반리- 세상에서 제일미워 등 잘 보다가..v.b로즈인가..거기에서 정말실망해서.. 정말 괜찮았는데 말이죠..ㅠ.ㅠ
Commented by greenday at 2009/05/20 05:56
와..님 어쩜이렇게 글을깔끔하게 쓰세요..ㅋㅋㅋㅋ 미국에선 나나 구하기 어려워서 인터넷 돌아다니다가
님 글읽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 님글이 더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네요 ㅋㅋㅋㅋ
Commented by 상마 at 2009/06/02 21:16
나나의 이야기를 계속 들려주었으면 하네요
Commented by 지나가는사람 at 2010/08/11 06:51
뒤늦게야 다는 댓글이네요 ㅎㅎㅎ전 얕은나나팬이고 그저 라이센스판으로만 감상하지만
.... 렌의 죽음은 충분히 예견되었던것으로 알려져있죠.
수많은복선과 시드와낸시같은 외부적인모티브에서나 ...근데 렌떡밥은 렌의죽음이 확실시되어왔어도 시점을통한 동일이름(어린렌)때문에
설마 죽은건아니겠지 했는데 ... 결국 낚인것같은 작가님의 계략일까요(나중에제대로된복선이나오지만)
ㅎㅎ 결말시즈음에는 나나가 다시 되돌아갔겠죠? 처음부터이어저오는 나레이션을 직접 마주보는대사로 어서듣고싶네요.
오랜만에 꽂혀서 님 블로그를 보고 생각해보니 여러가지를알았어요 왜 나나는 판형이 원본이랑 반대인것이나 이름번안 등... 큰이유는없어보이는데;;
기본적으로 문제는없겠지만 확실히 번역으로만 접하는 제입장에선 미묘한차이를 모를까봐 아쉽네요! 아무튼작가님완쾌하셔서어서보고싶어요

아 그리고 말씀하신 노부와하치 진짜 다시생각해보면 다른순정만화였으면 질릴대로질렸을텐데 ... 나나속에서그려질땐 전혀그렇지않아서 다시한번 리뷰보고 놀랍네요.
Commented by 에휴 at 2015/10/15 11:13
참.. 대부분저랑 같은생각. (전 레이라 반대파지만서도) 내생에 이런 임팩트 있는 만화는 다신 없을듯 싶다는.
그나저나 야자와님이 얼른 결말을 내주셔야 저도나중에 두눈감고 죽을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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